< 수필산책 28 >
새 애마를 타고 생애 최고의 순간을 향하여
엄재석/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지루한 건기가 끝나가던 10월의 어느 날 새 차가 나왔다. 도요타의 신형 이노바(INOVA)로 외관상 흰색 색상에 중후함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막상 타보니 이전의 차에 비하면 내부는 궁전이다. 넓은 앞뒤 좌석 간격이라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다. 천장에는 파란색상의 LED등과 측면 등이 있어서 조명 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모니터가 운전석뿐 아니라 뒤 좌석용 모니터가 있어서 음악이나 영화 감상도 가능하다. 앞 좌석 뒤에 서류 받침대에 올려놓은 핸드폰으로 좋아하는 바둑강좌를 편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다 트렁크에 좌석을 펼치면 운전수를 포함하여 최대 8인까지의 탑승도 그리고 트렁크 좌석을 접으면 골프 백을 4개까지 싣기도 가능하다. 차체도 높아서 우기철에 침수가 자주 되는 인도네시아 도로에 적격이다. 인니에 와서 길거리를 달리는 이노바를 볼 때마다 언제나 타보나 하며 부러워하였는데 이제야 나의 4번째 애마가 되었다. 물론 오토에다 중형차이니 기름값은 더 들어가겠지만……
새 차로 지난 3년간 나를 태우고 다니던 애마와 헤어지게 되었다. 별다른 고장은 없지만 소형차다 보니 좌석이 협소하여 승차감이 부족했다, 특히나 장거리를 다닐 때는 다리도 편히 펼 수 없었고 쿠션이 부족하여 쉽게 피로하였다. 특급 호텔에서 세미나가 있을 때 다른 참석자들이 떠난 후에야 기사와 차를 부르기도 했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귀한 손님을 모시면서 소형차의 아쉬움이야 말로 어찌 다 표현할까. 아무리 경비 절약도 좋지만 명색이 회사의 임원 차가 이것 밖에 안되나 하는 주제넘은 자괴감도 없지 않았다. 어쩌다 휴일에는 운전기사 없이 직접 운전하면서 수동식 기어로 오르막 길에 대기하다 출발할 때 미끄러짐에 두려움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제야 비로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국에 내 차는 없다. 인도네시아 생활이 장기화되며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기에 지난 봄에 폐차시켰다. 구형 산타페로서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에 긴요하게 사용하던 2번째 애마였다.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가 운전자로서 왕 노릇 했지만 아이들이 크니 뒷좌석으로 밀려나는 소외감도 맛보아야 했다. 그래도 애들이 커서 면허를 따고 아빠 대신 운전할 때 그 어깨가 얼마나 커 보이던지. 그 전에 생애 첫 번째인 현대의 엑셀은 10년 이상 우리 가족을 실어 나른 소형차였다. 사실 80년대에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차를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마이 카 시대라는 그 꿈이 도래하였다. 옆집에서 차를 사는 걸 보면서 어린애들을 키우느라 힘들었던 아내의 결단으로 구입하였다. 첫 차가 나온 날 겁 없이 끌고 나가서 양쪽 차문을 긁힌 사고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픈 추억이다.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의 교통체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이 부족하여 서민들은 주로 오토바이를, 부유층은 자가용으로 이동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통팔달의 지하철이 있고 이를 시내버스와 연계시킨 편리한 교통시스템이 있다. 이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어디라도 정시에 갈 수 있다.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열악하며 대부분의 시내 도로가 효율도 떨어지는 방사선형이다. 그러니 교통체증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만만치 않다. 30분에 갈 거리를 3시간씩이나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언제인가 수카르토하타 공항을 가다가 차량 마쩻(?)으로 중도에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시안 게임을 위한 차량 홀짝제로 교통이 흐름이 조금 양호해졌더니 이 제도를 연말까지 계속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아마도 이 정책은 상시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언제인가 중요한 공사의 입찰 일에 밀려있는 차량 행렬로 중도에서 고젝(오토바이 택시)으로 갈아타고 입찰 장으로 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운전할 때는 벌떼같이 에워싸고 앞지르는 오토바이들 속을 담대하게 헤쳐 나가야 한다. 어떤 차량 정체에도 절대로 화내지 말고 도착 시간을 운명에 맡겨야 한다. 약속시간 조금 늦는 건 이곳에선 다반사이기에.....
지난 주말에 처음으로 새 차에 아내랑 같이 올라서 전속기사 마스리가 운전하며 멘뗑에 있는 전통 인니 레스토랑 플라타란을 향했다. 인도네시아 여성과 결혼하는 동문 후배의 피로연 참석차 가는 길이였다. 흰색 이노바가 자카르타 중심부이자 번화가인 수디르만 도로를 달렸다. 차창에 떨어지는 빗물 사이로 보니 화로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빠뚱 뻐무다 (patung pemuda) 동상을 지난다. 좋아하는 영상 음악인 조수미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은은히 들리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고풍스런 레스토랑 정문에 도착하니 도어맨이 정중히 차문을 연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치 새 신랑, 아니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 나이에 이렇게 호강해도 되는걸까?
이제 새 애마 이노바를 타고 더욱 멋지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향하여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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