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 한국/소망의 길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원고

인해촌장 엄재석 2014. 8. 7. 21:47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원고

- "나의 5종목의 기원" -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자(君子), 위인(偉人), 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 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 년 살고 만 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
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자식을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몸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출처:http://cafe.daum.net/btfmr/34pO/123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
2008.06.12 03:43:46
선지자

■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


joogicheol.jpg

<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 순교한 소양 주기철(朱基徹) >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한국교회의 큰 별, 소양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개통학교에 입학, 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맏형 주기원이 목회했던, 웅천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 신앙교육을 받았다.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 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 심해져 낙향했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첫 부인이였던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

 

또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이로인해 주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 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 다섯 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 옥중에서 순교한 소양 주기철

 


1. 성장기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이끌고 조선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듣고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신앙교육을 받았다.

 

주기철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심해져 학업을 중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낙향한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잡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그는 김해 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그는 출신도 별로 나뉘어 있던 기숙사 제도의 맹점을 학교당국에 시정토록건의, 혼합방식을 채택토록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3. 신사참배 거부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고전해진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고한다. 그는 또 이때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이 계속되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4. 투옥 생활

이로인해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 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하지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고 한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5. 유언과 순교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
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 오정모 사모님



5.jpg                          
 
 

■  5년간 옥고 끝에 순교하신 주기철목사 운구앞에 선 산정현 성도들.


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