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인도네시아/참빛의 길

임이시여, 어찌 홀로 가셨는가!----양현광

인해촌장 엄재석 2019. 8. 8. 07:30


   

 


   

 

 


 

님이시여, 홀로 떠나 가셨는가!


참빛교회/ 양현광 장로


나는 김영도 집사를 마지막 떠나보내는 묘지 앞에서 영정을 든 아들과 함께
서 있는 부인의 사진을 보고 난 후로는 자카르타에서 생활하던 고인의 흔적
을 볼 때마다 가슴이 메여지는 아픔을 느낀다.
어제는 땅그랑의 현대아파트가 보이는 곳에 갔다. 2009년 초 무렵 그 아
파트에서 혼자 사는 고인의 방을 가본 적이 있었다. 혼자 사는 사람치고는
익숙한 살림살이에 가지런한 침대와 책상들이 당시 사업개발을 하기 위해
파견을 나왔다가 고생하던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곳으로 기억된다. 내려
와서는 얼마 전 중학생이던 아들 한욱이와 축구를 하던 곳이라면서 가라
와찌 넓은 잔디밭에서 공차던 시늉을 하던 그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떠올
랐다. 가라와찌의 생활은 전 직장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친구가 소개한 백화
점에 다녔던 시절로 가장 안정되고 오래 다녔던 직장으로 알고 있다.
2011년, 3년 후 내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파견 나온 후로는 그의 직장생활
환경이 쉽지 않아 보였다. 백화점에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고 진열하여 성공
적으로 런칭하는 아이디어를 투자자에게 제공하고 승낙받아 진행하는 방법
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업도 성공해야 하지만 일정시간
이 지나면 초급직원들이 백화점 관리와 판매에 익숙하면서 본인의 역할이
축소되면 본인이 떠나야할 곳을 찾아야 되는 것 같았다. 또한 원 소유주가
채용했어도 그 관리를 자식들에게 넘겨주면 그는 보따리를 싸야 했다. 탐닌
지역 원룸 2회, 이재혁 집사 집에 얹혀살기, 약 석달 간의 파크 원 아파트
무료임차, 낀따마니에 마련해준 임시 거처 살기 등등 안타까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는 분명히 프로다. 시내 백화점을 단 한번 돌고도 어느 위치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를 소상하게 기억했다. 아마도 본인의 경험이
라는 거울에 비추어 맘에 들고 들지 않고 까지를 이미 파악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백화점 판매에 대한 경험과 재능은 소유주 입장에서 보면

초기 사업이 진행될 때 외에는 그렇게 필요치 않은 것 같았고 본인이 나이
가 들어가면서 더욱 압박을 받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사직하고 나오면 본인
은 그동안 사귀었던 투자자들에게 한국 제품과 연관된 사업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들이 투자의 매력을 느껴 그를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채택
되어 일을 할 때면 신이 났다. 나를 만나면 신입직원들의 태도 수정이나
직접 변화를 준 진열방법 개선, 하루 하루의 매상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한 직장에서 얻은 시간은 1년을 가지 못했다. 어두운 생활
이 계속되었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 신규로 분양받은 집 분납금 때문에 무척
이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존감을 지켜야 하는 장부
로서 힘든 시간들이 짐이 되어 그의 육신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부인은 독일에서 6년 동안 공부하고 종교와 관련된 특정 과목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옷가게 등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시누와 시모를 모시고 함께
생활하고 있다. 부인은 대학 강사가 직업이었지만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각각 벌어서 각자의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가끔가다가 고인은 “우리
가 사는 것이 무늬만 부부지 헤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하면서 쓴웃음
을 짓곤 했다. 무엇이 이들 가족을 이렇게 갈라 놓았는가. 유능한 그 부부가
십수년 동안 일년에 한두 번 만나며 생활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런 험한 세상에 놓였던 고인은 내가 파견 임무를 마치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에 자카르타를 떠나 한국의 중견 의류 브랜드인 TWEE에서
일하며 싱가포르 지점을 개척했고 그곳에서 말레이시아와 자카르타 지점
을 열여 다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꿈을 꾸었다. 충분한 급여도 받고
분명 그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러나 다른 생활환경에 놓이면서 그동안
신체에 쌓여 있는 약한 부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 같다. 그의 신체는 급속
도로 악화되었고 내가 인도네시아에 다시 나오던 2018년 하반기부터는 휠체
어에 의존하고 입원까지 하게 되었으니 너무나 원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묘 앞에선 부인의 사진을 보며 한국에서 시모를 모시고 남편 없는
세상을 혼자 꿋꿋하게 살아온 점을 읽게 되었다. “여보, 내가 도와주지 못한
혼자의 삶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인생이 무엇이기에 나름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운명이 이렇게 가혹하고 어렵단 말인가요” 하며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후 고인 생각에 가슴이 메어진다. 자카르
타를 떠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참빛교회 OB들이 고인의 빈소를 찾은 그날,
아직 생존해 계시는 96세 되신 노모는 김성혜 선교사님의 손을 덥썩 잡고
“그렇게나 기도했는데 아들을 데려 가셨다” 며 우셨다고 전한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아들이 가진 병을 모두 내게 주시고 대신 늙은 이 몸을 먼저 데려
가 달라”고 수백 번 아니 수천, 수만 번 기도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이 또한
가슴이 짠해 온다.
엊그제는 고인과 많이 가까웠던 박병열 집사가 차 한잔을 하면서 그 며칠
전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김영호 집사가 고인이 많이 가던 세노파티 코너 돌던
찻집에 있으니 오라고 했단다. 만나 “이곳이 김영도 집사와 우리가 자주
와서 차 마시던 곳이지 않소? 생각이 나서 불렀습니다” 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시던 에스프레소 커피를 우리 언제
다시 마주 대하며 마실 수 있나요! 어렵고 힘든 삶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우리가 부를 때마다 해맑은 웃음으로 나타나던 님, 이제 천국으로 떠나 가버
렸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의 사진을 보며 고인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생각에 연신 가슴을 쓸어내린다.
김형, 당신은 이렇듯 비바람 몰아치는 모진 인생길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은 등잔에 깊게 드리운 심지처럼 흔들림이 타올랐습니다. 나는 주님의 일 앞
에서 당신이 ‘No’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2012년도에 남선
교회를 조직해서 지금의 토요 조찬기도회를 만들었고 교회당을 끄망 성전으로
옮기고는 기타반을 개설하여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언제나 기타 소리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셋째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온 성도가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하는 세·함·찬(셋째주일 함께하는 찬양)은 우리들의 희망이었습니다. 분명 참빛
교회 개척기와 부흥기에 남겨진 진한 커피 향 같은 당신의 흔적은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김형, 그곳은 평화가 있는 곳이라고 했으니 이제 세상일을 잊고 편히 쉬시오.
오늘의 이별은 차갑지만 우리의 새로운 만남은 따뜻하고 아늑할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주님, 우리 김영도 집사님의 가족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소서!
위로가 함께 하시고 아픔에 회복이 있게 하소서!
2019. 7. 5일, 이른 새벽에 이 글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