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자작 수필

어머니와 가마솥

인해촌장 엄재석 2018. 5. 8. 11:11

♧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님의 삶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하는 참 좋은 수필입니다. ♧
-- 밤이슬이 하염없이 녹슬다 / 어머니의 손등처럼 낡아진 가마솥 / 언젠가 고운님 떠나면 홀로 남을/ 가마솥의 슬픔을 누가 아시나요?  -- 엄재석님의 '가마솥의 슬픔' 중에서 --



수필 / 어머니와 가마솥---엄재석


 


지금 그 가마솥은 어찌 되었을까?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기와집 고택을 허물고 새집을 지을 때였다.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의 서양식 부엌에 가마솥은 필요 없는 물품 중에 하나였다어머니는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쓸데없는 물건들은 다 버려도 가마솥만큼은 따로 챙기셨다. 안방 부엌에 있던 가마솥을 뒤 뜰 장독대 옆에 따로 걸었다. 부모님 두분 만 계신 평소에는 가마솥이 한가했다. 하지만 명절 때는 귀향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어머니가 준비하는 음식 익혀 내느라 가마솥은 바빠야 했다. 명절 내내 오랜만에 만난 혈육들이 배불리 먹도록 두부, 송편 등 온갖 음식들을 어머니는 혼자서 손수 만드셨다. 휴가가 끝나고 자식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어머니께서는 남은 음식들을 챙겨 주셨다. 명절음식 외에도 직접 만든 참기름, 들기름에다 고추장, 된장, 간장까지 고루 차에 실었다. 그도 부족하신 어머니는 한해 동안 농사 지으신 곡식까지 자루 자루 실어 주셔서 승용차가 비좁을 정도였다. 이처럼 그때 명절에는 어머니와 덩달아 바빠야 했던 가마솥이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8년전 한겨울 어느 밤 중에 화장실 가시다 그대로 넘어 졌는데 다음 날 인근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검진을 받으니 병명은 뇌경색이였다. 중풍이란 노인성 질병으로 머리 속의 미세혈관의 경색으로 인한 반신불수의 병마가 어머니에게 닥쳤다. 그렇게 쓰러지신 후 어머니는 홀로 일어서지 못했다.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건강할 때는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논과 밭으로 뛰어 다니시던 분이었는데...... 일거리를 껴안고 사느라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땀으로 항상 범벅 진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가마솥 화목으로 쓰려고 쌓아 놓았던 장작을 절반도 못 때고 쓰러지셨다.


 


18살 나이에 어머니는 양조장 집으로 시집을 오셨다.


엄하신 시부모 밑에서 시집살이가 살얼음판 같았다고 넋두리 하셨다. 3 1녀를 낳고 키우신 어머니는 둘째인 나를 강추위 동지 섣달에 낳으셨다. 집 앞 개천에서 꽁꽁 언 얼음을 깨고 똥 기저귀를 빨 때 어머니는 손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며 “너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아냐?” “돌아 가신 외할머니 생각에 더 서러웠단다” 하시며 “다른 애들은 봄과 가을에 나왔는데 왜 너는 한겨울에 태어나서 나를 생고생시켰냐?” 하면서 내 머리에 꿀밤까지 주셨다. 어머니는 꿈 같은 신혼이지만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셨다. 막걸리 제조에다 농사 일로 온 집안이 쉴 틈이 없었다. 일꾼들 끼니 준비하느라 가마솥 아궁이에 마르지 않은 청송을 넣고 불 지필 때 어린 새댁은 많이도 눈물 흘리셨단다.


 


쓰러지신 어머니께서는 치료 차 전국의 병원들을 전전하셨다.


양방뿐만 아니라 한방 치료도 받았지만 반신불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일어서기와 걷기를 반복하는 재활치료를 계속하였지만 병상을 벗어 날 수 없었다. 용인의 재활병원에 계실 적에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집으로 모셨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짚 앞에 텃밭으로 가니 예전처럼 밭에 가서 일하고 싶은 욕망에 소녀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나 다시 병원으로 가고자 고향집을 나서면서 가마솥을 바로 보던 어머니께서는 결국 눈물까지 살짝 비치셨다.


나중에는 재활치료를 포기하고 노인요양원으로 옮기셨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만큼이나 육체와 정신상태는 노화되셨다. 아토피로 건조한 피부를 너무 긁어서 성한 한쪽 손을 침대에 묻어 놓아야 했다. 운동부족으로 몸 무게는 아프기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 들며 피골이 상접하여 보기조차 안쓰러웠다. 거기다가 세월의 질곡 탓으로 나타나는 치매현상으로 친했던 지인들도 겨우 알아 보신다. 입원 초기에는 주위에서 불평이 나올 정도로 집으로 보내 달라고 고성을 치시더니 이제는 그 말문마저 닫으셨다. 아마도 고향집으로 돌아 가야 한다는 원초적 본능마저 떨쳐 버리셨나 보다. 그러더니 작년에는 갑자기 곡기를 끊으시고 혈압도 떨어지자 아버님은 혈육들을 모두 불렀다. 이제는 가시려나 하는 안타까운 예감 속에 급거 귀국하여 어머니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중환자실에 어머니는 코에 달린 호스로 영양제를 공급받으며 실 끈 같은 생명을 연명하는 준 식물인간으로 나를 맞이 하셨다


 


어머니! 이렇게 사시느라 얼마나 힘드세요?


말도 못하고 걸어 다니는 건 물론 혼자서는 소변조차 처리 못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젊어서 편하신 날 없었던 어머니가 늙어서도 고생의 연속입니다. 삶의 인연을 끊고 힘든 일도 고통도 없는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시겠지요. 하지만 좀 더 사셔야 합니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 탓이 아닙니다. 욕심이지만 누구보다 90의 나이에 어머니 곁을 지키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 하루에 한번씩 어머니의 병문안 가는 것이 랍니다. 비록 대화는 없어도 남편을 위해 한평생 고생하신 어머니를 바라 보기만 해도 위안이 되신 다네요. 거기에다 한 겨울에 기저귀 빨래로 어머니의 손등을 갈라지게 만든 둘째도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뵈면 부지깽이 같은 손을 꼭 잡고 엄마 품에서 안겨야 할 어린 애랍니다.


 


(가마솥의 슬픔)


 


고향 집 뒤뜰에
그을음이 더덕 진
무쇠 가마솥


 


밤 이슬에
하염없이 녹슬어서
어머니 손등처럼
낡아진 가마솥


 
한평생을 함께 한
사랑하는 님의 아픔에
밤 세워 가슴 조렸을
뒤뜰 가마솥         


 


언제인가
고운 님 떠나면
홀로 남을
가마솥의 슬픔을
누가 아시나요?


■ 수필 / 어머니와 가마솥 ■
엄 재 석 / 문협 인니지부 회원


고향집의 가마솥은 어찌 되었을까?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기와집 고택을 허물고 새집을 지을 때였다. 슬라브 지붕의 양식으로 짓는 새집 부엌에 가마솥은 필요 없는 물품이였다.  새집으로 이사하며 어머니는 쓸데없는 물건들은 다 버려도 가마솥만큼은 따로 챙기셨다. 뒤 뜰 가장자리에 새로이 걸은 가마솥은 부모님 두분 만 계신 평소에는 한가하게 녹만 슬었다. 하지만 명절 때는 귀향하는 자식과 손자들을 위하여 어머니가 준비하는 음식들로 가마솥은 바빴다. 명절 내내 오랜만에 모인 많은 식솔들이 배불리 먹도록 두부, 송편 등 온갖 음식들이 가마솥 뚜껑을 열면 나왔다. 명절이 끝나고 자식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어머니는 남은 음식들을 챙기었다. 음식 외에 손수 만드신 참기름, 들기름에다 고추장, 된장, 간장까지 퍼 주셨다. 그도 양에 안차신 어머니는 한해 동안 지으신 곡식까지 자루 가득 실어 주셔서 승용차가 비좁을 정도였다. 이처럼 그 시절 명절에는 어머니와 덩달아 바빠야 했던 가마솥이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8년전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중에 화장실 가시다 그대로 넘어 지셨다. 다음 날 인근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검진을 받으니 병명은 뇌 경색이였다. 소위 말하는 중풍으로 뇌 속의 미세혈관이 막힘으로 인한 반신불수의 병마가 어머니에게 닥쳤다. 그렇게 쓰러지신 후 어머니는 홀로 서지 못하셨다.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건강하실 때는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논과 밭으로 뛰어 다니시던 분이었다. 항상 일거리를 껴안고 사셨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땀으로 범벅진 촌노의 모습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가마솥에 때기 위하여 장독대 옆에 쌓아 놓았던 장작을 절반도 못 쓰고 쓰러지셨다.


18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는 강원도 영월의 일 많은 양조장으로 시집을 오셨다. 꿈 같은 신혼에도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일하셔야 했다. 막걸리를 만드는 일에다 농사 일로 온 집안이 쉴 틈이 없었다. 일꾼들 끼니 준비하느라 가마솥 걸린 아궁이에 청 솔을 넣고 불 지필 때 어린 새댁은 많이도 눈물 흘리셨단다. 엄하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밑에서 며느리의 삶이 살얼음판 같았다고 넋두리 하셨다. 그 와중에서도 3남 1녀의 자식을 낳고 키우셨다. 어머니는 둘째인 나를 강추위 동지 섣달에 낳으셨다. 집 앞 개천에 가서 꽁꽁 언 얼음을 깨고 갓난 애의 기저귀를 빨 때 어머니는 손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며 “너 때문에 집 앞 개천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아냐?” 하시면서 “돌아 가신 외할머니 생각에 엉엉 울었단다” 하시며 “다른 애들은 봄과 가을에 나왔는데 왜 너는 한겨울에 태어나서 나를 생고생을 시켰냐?” 하면서 영문없이 내 머리에 꿀밤까지 주셨다.


한번 쓰러지신 어머니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시작으로 전국의 병원들을 전전하셨다. 양방뿐만 아니라 한방으로도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일어서기와 걷기를 반복하면서 재활치료를 계속하였지만 병상신세를 벗어 날 수 없었다. 용인에 있는 재활병원에 계실 때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집으로 모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텃밭으로 가니 예전처럼 저 밭에 가서 일하고 싶은 욕망을 소녀 같은 표정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나 다시 병원으로 가기 위해 고향집을 나설 때 가마솥을 바라 보는 어머니의 눈길에는 눈물까지 비치셨다.


그렇게 여러 전문병원을 다니시다 나중에는 노인요양병원으로 가셨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만큼이나 육체는 노화되었고 정신상태는 퇴화되었다. 아토피로 건조한 피부를 너무 긁어서 한쪽 손을 침대에 묻어 놓아야 했다. 운동부족으로 몸 무게는 한창 때보다 절반으로 줄고 피골이 상접하여 보기조차 안쓰러웠다. 거기다가 세월의 질곡 탓으로 나타나는 치매현상으로 귀여워했던 손자들도 겨우 알아 보신다. 입원 초기에는 주위에서 불평이 나올 정도로 집으로 가겠다고 고성을 치시더니 나중에는 말문마저 닫으셨다. 아마도 고향집에 대한 추억과 돌아 가야 한다는 원초적 본능마저 떨쳐 버리셨나 보다. 그러시더니 작년 여름에는 갑자기 곡기를 끊으시고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자 아버님은 혈육들을 모두 불렀다. 이제는 가시려나 하는 예감에 내 자신도 마음 속 준비를 하고 자카르타에서 급거 귀국하여 어머니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중환자실에 어머니는 코에 달린 호스로 영양제를 공급받으며 실 끈 같은 생명을 연명하는 반 식물인간이 되셨다.


어머니! 이렇게 사시느라 힘 드시죠? 말도 못하고 걸어 다니는 건 물론 혼자서는 대소변도 못하시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젊어서 편하신 날 없었던 어머니가 늙어서도 고생의 연속입니다. 속히 이승의 끈을 놓고 싶으신 건 아니지요? 힘든 일도 괴로움도 없는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시겠지요? 그래도 더 사셔야 합니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 탓이 아닙니다. 욕심이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랍니다. 누구보다 9순의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어머니 옆에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 하루에 한번씩 어머니에게 병문안 가는 것이지요. 비록 병상의 아내지만 바라 보기만 해도 아버지에겐 큰 위안이 된답니다. 게다가 한 겨울에 개천 빨래로 어머니의 손등을 갈라지게 만든 저도 있습니다. 다시 뵈면 부지깽이 같은 엄마 손을 붙잡고 빨래판 같은 엄마 볼에 비벼야 성에 차는 이 아들과 어머니 가시면 홀로 남아 울어야 할 가마솥도 있답니다.


(가마솥의 슬픔)


고향 집 뒤뜰
그을음이 더덕 진
무쇠 가마솥


밤 이슬에
하염없이 녹슬다
어머니 손등처럼
낡아진 가마솥

 

어머니의  오랜 친구
한평생을 함께 한
사랑하는 님의 아픔에
밤 세워 가슴 아팠을
뒤뜰 가마솥


언제인가
고운 님 떠나면
홀로 남을
가마솥의 슬픔을
누가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