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자작 수필

눈 덮힌 산소에서......97년 9월호 토목학회지에서

인해촌장 엄재석 2009. 12. 16. 06:11

대한토목학회지 1997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발취하여 다시 올려 봅니다.

IMF가 시작된 1997년 년초에 쓴 글인데

그 때의 살벌함이 바로오늘 아침의 날씨네요.

 

눈 덮힌 산소에서

 

엄재석

토목학회 정회원

LG건설(주)IT기획팀/차장

 

 설날이 되어 찾아 온 할아버님의 산소에는 전에 내린 흰 눈이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 탓으로 녹지 않고 있어 마치 북극 에스키모인의 집을 연상케 한답니다.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국가적 난국이라는 IMF의 차가운 한파가 모두에게 몰아치는 이 현실의 아픔을 지하에 계신 할아버님께서도 함께 하시는 듯이 느껴집니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 모두에게 엄청난 어려움과 인내를 요구하는, 예기치 못했던 이 시련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누구도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불민한 후손들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기에 할아버님 산소 앞에 복배하면서 생전에 할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이 난관의 극복을 위한 지혜를 찾아 봅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양조업을 경영하실 정도로 자수성가(自手成家) 하셨지요.

 할아버지 덕분에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곤궁했던 1960년 시대에 저는 부잣집 손자로서 배 한번 곯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자라서는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기야 할아버님께서는 마당청소를 할 때도 복이 나간다고 대문밖에서 집안으로 쓸게 하고 세숫물도 걸레를 빨고 화단에 버릴 정도로 절약정신을 생활화하셨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을, 특히나 한학을 사랑하시어 성현의 말씀을 틈나는 대로 들려 주셨고 방학 중에는 사설 서당을 운영하여 천자문(千字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익히게 하셨답니다.

 애써 가르쳐주신 덕분에 할아버님 제사 때는 직접 축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붓글씨 수준을 부족하나마 갖추게 되었답니다.

 어느 해인가, 병들은 걸인이 고향에서 죽겠다고 찾아왔을 때 할아버님께서는 그 걸인이 죽는 날 까지 숙식을 제공하시고 장사까지 지내준 일이 있을 정도로 불쌍한 이웃에게 인정을 베푸는 다정한 면도 있었지요.

 할아버님께서는 젊은 시절에는 면장, 교육위원 그리고 대의원으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영월엄씨 종친회장과 성균관(成均館) 전교(典敎)로서 일 하셨답니다.

 

 할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신지 벌써 10년이 가까워 옵니다.

 언제나 항상 함께 하실 줄로만 알았던 할아버님도 세월에는 어쩔 수 없기에 오늘처럼 추웠던 겨울 밤에 홀연히 가셨지요.

 제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님을 따라서 선조님의 시제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던 고개길에서 눈 아래 펼쳐진 고향의 들판을 보고 “할아버지, 저기 아래에서 어느 논이 우리 것이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지요.

 7-8살 어린 손자의 물음에 감격하셨던 할아버님께서 “여기가 우리 땅이고 저기가 우리 논이란다”라고 일일이 설명하신 후 “너는 이 다음에 커서 학업을 마친 후에 고향에 와서 가업을 이어 가라” 하시면서 저의 작은 손을 꼭 잡으셨던 할아버님이셨지요.

 하지만 할아버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족적을 흉내 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저를, 이따위의 IMF한파에 떨어야 하는 저로서는 오늘 할아버님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답니다.

 하지만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갔지만 지금도 할아버님을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답니다.

 

 할이버님, 참으로 어려운 무인년(戊寅年)의 첫날입니다.

 매일 부도(不渡)와 화의로 여러 기업들이 무너지고 구조조정, 정리해고, 감원 등으로 수많은 직장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이 모두의 책임을 일부 위정자에게 돌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때의 작은 성취에 도취하여 근검정신을 잊은 채 과소비의 삶을 운위한 우리의 탓이 더 크 겠습니다.

 천연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에서는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밤낮없이 일하고 한방울의 물도 아껴쓰는 근검절약의 정신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안타깝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한파에 좌절하지 않고 일제시대와 6.25동란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 우리 민족 조상의 지혜와 경륜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다시 뛴다면 이도 극복할 수 있겠지요.

 모두의 철저한 자기 반성속에 가치의 극대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하고 자기 희생에 모두가 동참함으로 IMF의 난관을 극복하는 저력을 보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내년 설날에는 웃는 모습으로 성묘 할 수 있게 되길 기원하며 할아버님이 좋아 하셨던 옛 성현(聖賢)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눈 덮인 산소를 떠나 갑니다.

不經一事 不長一智

生事事生 省事事省

(한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가지 지혜가 늘지 않고,

일은 할려면 얼마든지 있고, 하지 아니하려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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