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자작 수필

최형(崔兄)에게-----토목학회지 96년 8월호에서

인해촌장 엄재석 2009. 11. 23.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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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에 수필을 쓰겠다고 치기를 부리며

월간지에 기고하여 발표한 졸작을 최근에 찾았습니다.

아쉬운 부분을 퇴고하여 블러그에 올려 봅니다.

직장의 변동에 따른 느낌을 서간문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현란한 사자성어가 이제 보니 부끄럽기만 하네요.

 

 

최형(崔兄)에게


엄 재 석

정회원/LG건설(주) 차장

서울지하철 6-10공구


   그 어느 해 보다도 길었던 지난 2월, 전직이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로 번민해야 했던 2월이 지나 간지 어느새 반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고 보니 구상유취(口尙乳臭)한 미숙(未熟)의 나이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여 불혹의 연륜(年輪)을 바라보는 30대 말까지 15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연부역강(年賦力强)한 시기를 보낸 K사(社)를 막상 떠나기로 결심 할 때는 참으로 어려웠던 순간이었답니다.

  

   K사, 회사의 비애(悲哀)가 저의 슬픔이었고 저의 기쁨이 회사의 영광이었던 K사에서의 재직 기간 중에 저는 풋내기 초임 기사로 시작하여 국내외 현장과 본사를 전전하며 부족하나마 중견 기술자로 성장시켜준 K사를 떠나게 된 변명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정서가 전직이란 변신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모두가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되겠지요.

  단지 저로서는 자기 변화에 대한 득롱망촉(得隴望蜀)의 욕심 때문에 이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을 각오하고 제 2의 직장 인생을 시작한 저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와 신입사원 생활을 함께 시작하여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며 숱한 추억과 사연들을 공유하고 있는, 누구보다도 저를 이해하는, 그리나 갑작스런 저의 변신에 아쉬움이 심했을 최형에 대한 신의의 상실이 저로서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아픔이었나 봅니다.

  

  이제야 뒤돌아보니 토목이란 매개체로 인한 최형과의 인연은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80년대 초반 할라스 열풍이 드높이던 한여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에서 최초의 만남이 있었지요.

   알코바-담맘 고속도로현장에서 최형은 공무기사로 저는 교량담당 시공기사로 토목인의 햇병아리시절을 같이 보내며 초보의 설움과 이역만리 해외생활의 외로움도 함께 나눈 동병상련의 그 시절이었답니다.

   최형과 저는 군의 선후배라는 남다른 인연도 있었지만, 장마 끝의 밝은 햇살 같은 환한 얼굴과 정갈한 성격 그리고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추구하고 마는 업무처리능력이 저로 하여금 현장의 그 어느 직원보다도 최형을 가까이 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어느 휴일 전날 밤, 현장의 전 직원들과 함께 밤낚시 하러 간 선샤인해변(Sunshine beach)에서 최형과 둘이 청담(淸談)으로 밤을 지새울 때 아랍 해의 밤을 멀리서 드문드문 밝혀 주던 그 칸델라 불빛들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고 있답니다.

   또 다른 해외 생활인, 최형은 네팔에서 저는 방글라데시 현장에서 따로 근무하느라고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기에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여름철 라마단(Ramadan)휴가를 이용하여 네팔 현장을 방문하였답니다.

  하지만 최형께서 과로로 인한 신병 때문에 인도로 후송되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하여 푸른 하늘에 병풍처럼 펼쳐진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 설봉만 쳐다 볼 수밖에 없었지요.

 

 오랜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비슷한 시기에 같이 귀국하여 본사의 한 부서로 발령받아 근무하던 시절 우연하게도 서로의 집이 같은 아파트 단지라 일과 뿐만아니라 후까지도 자주 어울렸지요.

  그러다 보니 즐거운 일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었고 양쪽 집 식구들에게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었답니다.

  한동안 본사에서 근무 후 각자 다른 현장으로 전근되었다가 천안(天安)의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현장에서 최형은 설계담당으로 저는 공무담당으로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룸메이트로 한방에서 지내게 된 것이 90년대 초반의 어느 해 늦가을 이었지요?

  2년 가까운 기간을 돌관 공사로 바쁜 현장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남다른 시험 준비를 하던 제자신인지라 이중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그래도 최형의 자상한 배려와 격려 덕분에 난관을 헤쳐 나 올 수 있었고 뜻한 바를 이루었을 때 함께 기뻐했던 최형이지요.

  잊을 수 없는 일로 백설이 온 누리를 가득 채우던 어느 밤에 서로가 센치멘탈한 기분을 억제할 수 없어서 시작된 한잔 한잔의 소주잔이 장소를 옮기며 계속되다 보니 마지막 잔을 나눈 자리가 병천면의 어느 산 속 납골당 앞이었지요.

  

   최형(崔兄)!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월의 어느날, 수서양단(首鼠兩端)의 고민을 끝내고 최초로 최형에게는 저의 변화된 마음을 보였을 때 저를 이해한다 하였지요.

   하지만 그때 저를 응시하던 최형의 진한 눈빛은, 선샤인해변(Sunshine beach)에서 납골당(納骨堂)까지 오랜 시간 속에 우리가 함께 했던 숱한 사연들이 귀갓길 차창밖의 가로등 되어  스쳐갔답니다. 그 때 한강 물결 위를 비추던 달빛은 또 다른 칸델라 불빛으로 남겠지요.

  그 동안의 여정에서 제가 준 것 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아서 미안함이 적지 않았는데, 함께 직장 생활을 하자던 그 약속을 져 버린 것를 이해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어차피 이제는 그 변화도 과거지사가 되었고 새 삶에 적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뛰는 요즘이랍니다. 예전의 회사의 모두를 잊고 새로운 터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초심자(初心者)의 자세로 일하고 있답니다. 우선은 현재 몸담고 있는 현장의 지하철 구조물이 최공의 기술과 품질로 안전하게 건설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뜻하지 않던 계기로 서로 달리 가고 있지만 모든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듯이 우리도 토목의 길로 가다보면 언제인가 다시 조우(遭遇)하는 날이 있겠지요.

  그 때 서로의 변화된 모습으로 인하여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수 있도록 성실히 정진하여야 하겠고 새로운 환경이라도 우리의 소중한 문경지교(刎頸之交)는 계속되길 빕니다.

  끝으로 한때는 저의 다른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밖에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최형이 몸담고 있는 K사(社)의 발전을 기원하며 이 글을 마감합니다.

사우디 현장의 소장님과 공사부장님의 최근 모습 

또 다른 현장 직원들의 최근 모습 

에전에 역전의 얼굴들이 모여서 송년회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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