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화문 |
|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던 문이었다. 하지만 1926년에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화재로 문루 부분이 소실되어 석축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8년에 석축을 모아 원래 위치로 옮기고 문루 (門樓) 부분은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으며, 현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바꾸었다. 경복궁의 외곽성은 외적에 대한 방어 목적보다는 궁궐에 위엄을 더하고 궁전을 호위할 목적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낮게 쌓고 그 둘레의 동서남북에 각각 성문을 만들었다. 그 중 광화문은 남문에 해당한다. |
|
2. 흥례문 |
|
흥례문 일곽은 1910년 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
|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
3. 근정문(보물 제 812호) |
|
광화문을 들어서서 수문장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잡은 흥례문에 이른다. 흥례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근정문이 있다. 고종 4년에 중건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시설을 하였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
|
4. 근정전(국보 제223호) |
|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 하여 넓고 높다. 중앙에 임금이 좌정하던 어좌가 있다. 실내에 가득 의장기물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
|
근정전 둘레에 이간통의 행각이 있고 남행각 중앙에 다락문인 근정문이 있다. 옛날엔 근정문 남쪽에 흥례문, 그 남쪽에 정문인 광화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행각에서 남행각으로 꺾이면서 두 번째칸 기둥 앞에 서서 약간 굽힌 자세로 바라다보면, 근정전의 우람한 자태와 처마곡선이 북악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되어 선율을 이룬다. 근정전을 바로 이 자리에 자리잡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
|
근정전의 내부와 천정 |
바깥에서 보기엔 중층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훤히 트여서, 방전(方塼)을 깐 바닥에서부터 소란반자한 천장까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장엄이다. 고주의 내진주(內陣柱)들이 용립하여 숲을 이루어 법전 내부를 깊은 듯이 의도하고 중앙간 고주 주간을 막고 어좌를 마련하였다. 아래 위층이 구분되는 곳에 별창방을 돌리고 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雲宮)으로 치장하였으며, 아래로는 낙양각을 하였다. 법전 내의 텅빈 공간은 이 어좌의 장엄을 꾸미기 위한 의장물(儀杖物)들의 배설을 의도하고 설정한 것이어서 내부의 초점은 어좌에 있다. 아득하게 솟아오른 고주 위에서 대들보를 걸고 그 양 볼에 의지하고 우물천장을 꾸몄다. 우물천장 중에는 소란반자가 제일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반자틀과 소란과 청판에 아름답게 치장하는 단청을 하여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이룬다. 중앙간 천장 중심부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따로 만들고, 거기에는 채운간(彩雲間)에서 여의주를 다루는 두 마리의 황룡을 장식하였다. 황룡은 비늘까지도 그대로 세각(細刻)하였다. 이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신과의 어떤 소통을 위한 대화로 보인다. |
|
근정전의 월대(月臺) |
월대(越臺)라고도 한다. 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으로 돌기단을 구성했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부분 넓이보다 앞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근정전 월대 남쪽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 좌우로 좁은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소맷돌은 해태가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답도에는 게풍 사이에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되었다. 좌우로 해태와 같은 벽사의 신이 강역을 수호하여 주는 가운데 넝쿨같이 어울려 사는 백성들이 봉황 같은 왕족을 중심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
|
5. 천추전 |
|
사정전의 서쪽에 있고 동편의 만춘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천추전은 고종 4년에 사정전과 더불어 중건 되었다. 임란 이전의 천추전은 문화창조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 전각을 즐겨 이용하였다. 또한 이 전각에서 1452년 문종이 승하하였다. 천추전은 평면이 24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공포는 무익공이고 기둥 높이는 9자이다. 사정전의 기둥 높이가 15자이고 공포도 내7·외5포의 다포계로 격조를 한껏 높인 것에 비하면 아주 조촐한 법식에 따라 지었다. |
|
6. 사정전 |
|
근정전의 뒷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는데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 남행각에 사정문, 동행각에 득영문, 서행각에 숭현문이 있었다. |
|
7. 만춘전 |
|
사정전 서쪽의 천추전과 똑같은 규모로 동쪽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6.25 때 피해를 입어 댓돌 위에 기둥을 세웠던 주초석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8년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 사정전에 비하면 그 양식이나 수법이 검소하게 꾸며졌다. |
|
8. 자선당 |
|
<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에 보면 「자선당은 융문루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으로 쓰는 곳이다」하여 임진왜란 전후의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북궐도형>에는 자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합 28칸이고 중앙부 6칸은 대청, 좌.우 2칸씩은 온돌방이며 둘레의 툇간은 방, 퇴로 구성되었다. |
9. 수정전 |
|
세종 때 경회루의 남쪽, 천추전의 서쪽에 보루각과 흠경각, 집현전을 지었는데, 이 전각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자 그 자리에 고종 4년 수정전을 중건하였다. 규모가 40칸으로 현존하는 경복궁내의 전각으로는 가장 칸수가 많다. 동복도 13칸, 서복도 9칸과 동행각 33칸, 서행각 33칸, 남행각 33칸, 북행각 30칸, 중행각 22칸, 동외행각 20칸, 서외행각 20칸반의 행각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로 사용된 바 있고, 1895년 1월부터는 내각청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 이웃에는 대전장방, 내반원, 수라간, 정원, 빈청, 선전관직방, 검서청, 옥당, 약방, 의관방 등의 건물이 즐비하였다. 지금은 수정전만이 홀로 남아 있다. |
|
10. 경회루(국보 제224호) |
|
경복궁 창건시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을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
|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
|
- 경회루의 불가사리 |
옛날부터 불을 잡아먹는 불가사리란 짐승이 살았다고 한다. 얼른 보면 코끼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코끼리와는 다른 여러 가지 신격(神格)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한다. 목조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기(火氣)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 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분이라고 하는데, 불가사리 자신은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제몸으로 경회루의 재앙을 막은 것이다. 이 밖에도 경회루의 돌다리와 난간에는 여러 서수상(瑞獸像)들이 조각되어 있다. |
|
- 경회루 방지(方池) |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침전의 서쪽에 연결된 원지(苑池)로서 잔치도 하고 뱃놀이도 즐기며 때로는 외교사절을 영접하던 곳이다. 방지의 규모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며, 못 속에 장방형의 섬이 세 개 있다. 동쪽의 큰 섬에는 세 개의 아름다운 돌다리를 설치하고 웅장한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경회루가 있는 이 섬의 둘레와 돌다리의 좌우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세우고 돌란대를 설치한 돌난간이 돌려 있고, 다리 앞뒤와 난간이 꺾이는 곳에는 해태석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배를 타는 선창 시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이런 용두는 북쪽 지안(池岸)에도 하나 있다.
1506년 연산군 시대 기록을 보면,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어 화려한 꽃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 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또 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용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못의 서쪽과 북쪽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숲이 있었다. 경회루 방지는 조선시대 원지(苑池) 중에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조형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꼽힌다. |
11. 영추문 |
|
동쪽이 봄이면 서쪽은 가을이다. 궁의 서문은 가을을 맞는다고 하여 영추문이라 이름지었다. 원래 문밖에 명당수가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문안에 수문장청, 소궁청, 직소, 루국(漏局), 내사복이 있고, 궁의 담 끝에 서십자각이 있었다. 홍예문이 하나 열린 육축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했다. |
|
12. 건춘문 |
|
경복궁의 동문(東門)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육축을 높이 쌓고 중앙에 홍예문 하나를 열었다. 공포는 이익공이며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이다. 조선조의 척도인 영조척(營造尺)으로 홍예 높이 16.5자이고, 너비는 15자이다. 이는 15자 사방의 정방형에서 그 대각선 길이 16.5자를 홍예의 높이로 설정한 수치인 것이다. 이간통(二間通)의 3칸인데 기둥 높이 8자이고, 3칸 중 중앙칸은 17자, 좌우협간은 8자로 합계 33자이다. 이때의 측면 2칸의 간살이 넓이는 각각 8자 2치 5푼식으로 합계 16자 5치가 된다. 긴 변과 짧은 변과의 비례 설정에 따른 계산에서 채택된 수치들이다. |
|
- 건춘문의 육축과 계단 |
궁성보다 높게 육축을 쌓고 홍예 위에 문루를 올려세운 구조여서 필요에 따라 수문장졸들이 문루에 올라가야 할 때 좌우에 설비된 돌층층다리를 이용하게 된다. 층층다리는 급한 경사로 마치 사다리처럼 구조되었는데, 안전도를 고려해서인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협문이 있고, 협문은 육축 가장자리에 쌓은 여장(女墻)에 이어져 있다. |
|
- 건춘문 홍예천정의 용그림 |
파랑·빨강·하양·노랑·검정 등 다섯 가지 색을 써서 구름과 용을 그렸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황룡을 그렸는데 모두 여의주를 얻었으므로 만사가 뜻대로 이뤄진 모습이다.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오조룡은 제왕을 상징한다. |
13. 강녕전 |
|
강녕전은 정면 11칸,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
|
14. 교태전 |
|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 일곽에서 양의문을 들어서면 정면9칸, 측면 7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
|
15. 아미산 |
|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이 아니라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매화, 모란, 앵두,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단 위에는 배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다. |
|
- 아미산의 굴뚝(보물 제811호) |
아미산 화계에 설치된 이 육각형 굴뚝들은 화계 앞에 있었던 교태전의 굴뚝이다. 굴뚝의 높이는 지붕을 제외하고 2.6미터쯤 되며, 육각 한 벽면의 폭이 88센티미터쯤 된다. 지붕 위에는 네 개의 연가가 배치되어 있다. 굴뚝 최상단 벽면에는 당초문이 새겨졌고, 그 밑에 용, 학, 박쥐 등의 문양전이 배치되었으며, 정남에는 용문전을 배치하였다. 문양전의 밑 벽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국화 조형전이 배치되고, 북쪽면에는 희(囍)자 등 글씨가 새겨졌다. 이들 조형전의 밑 벽면에는 호랑이, 해태, 박쥐, 학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문양은 군(君), 신(臣), 절의(節義), 부귀, 장수, 벽사를 상징한다. 이 네 개의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화계의 조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16. 자경전 (보물 제809호) |
|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고종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
|
- 자경전의 만세문 |
만세문(萬歲門)은 남행각에 딸린 문으로 행각 서쪽에서 8째칸과 9째칸 2칸이 출입문으로 되어있다. 문은 각각 네짝씩 당판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행각은 다듬은 사각초석위에 각기둥을 올렸고 연목,도리,보 등에 모로단청을 이루고있다 |
- 자경전의 청연루
자경전 동쪽 끝에서 한 칸이 앞쪽으로 두 칸 돌출하였다. 높직한 흘림의 방주에 의지하고 돌출 부분의 나무 기둥들이 섰다. 이렇게 돌출 구성되는 다락을 내루라 한다. 정면 1칸 측면 2칸, 정면 1칸 측면 1칸 또는 정면 2칸 측면 2칸, 혹은 정면 2칸 측면 1칸 등으로 구성되는 수가 많은데, 여기에선 정면 1칸 측면 2칸의 법식을 채택하였고, 지붕 처리를 고려하여 팔작지붕 합각이 앞쪽을 향하게 하였다. |
|
-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
꽃담처럼 담에 붙여서 만든 굴뚝으로,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이다. 굴뚝벽의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그리고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
|
- 자경전 꽃담 |
자경전의 서쪽 담은 주황색의 전(塼)으로 축조한 꽃담이다.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格子紋), 육각문(六角紋),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
17. 함화당 |
|
집경당의 서쪽에 있으면서 서로 내부에서 왕래할 수 있게 구조된 복도삼간으로 이어져 있다. 규모는 17칸이고 2칸의 내루가 있는 오량집이다. 옛날엔 복도 남쪽에 샛담이 있고 계명문이라는 일문과 영춘문이라는 월문이 있었다. 또 서행각 8칸과 남행각 11칸, 외행각 13칸이 있었고, 영지문(迎祉門)·창무문(彰武門)이 일각문으로 열린 간장(間墻) 들이 더 있었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함화당만이 남아 있다.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
|
18. 집경당 |
|
집경당은 함화당과 침전 중의 하나이던 흥복전에 예속된 건물이다. 아미산의 북쪽에 흥복전 일곽이 있고, 그 북쪽에 광원당이, 광원당 북쪽에 집경·함화당이, 그 이웃에 영훈당이 있었으나 다 없어졌다. 지금은 집경·함화당만이 남았다. 경복궁에 총독부박물관을 지을 때 집경당과 함화당이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집경당은 28칸반 규모의 이간오량집으로 내루가 있으며, 동행각은 6칸에 봉양문(鳳陽門)이 있고, 서행각은 5칸에 백상문이 있으며, 남행각은 10칸으로 향명문(嚮明門)이 있고, 북행각은 9칸반, 반반간이었다. 그 북쪽 담장에는 일각문인 응복문(應福門)이 있어 서쪽의 함화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
|
19. 향원정 |
|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 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령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
|
- 향원지와 취향교 |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
20. 명성황후 시해 당한 장소 |
|
청일전쟁이 끝난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일인(日人)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경복궁 후원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와 많은 상궁을 살해하였다. 명성황후라는 시호(諡號)는 광무원년(1897)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처음 남청량리에 장사(葬事)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洪陵, 경기도 금곡)에 이장하였다. 사진의 비석(碑石)은 1981년 11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경복궁내의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 세운 것이다. |
|
21. 집옥재 |
|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함께 창건한 건물로 추정된다.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은 고종 28년(1891)7월 이후였고,고종 30년엔 집옥재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한 바 있다. 집옥재는 높은 댓돌에 큼직한 삼구의 석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한단을 더 설치하여 고형(鼓形)주초석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20간이고 집은 맞배지붕형이며 좌우 박공 아랫벽은 전(塼)으로 초담을 쌓았다. 마치 중국집의 구조와 같은 벽돌담이다. |
22. 신무문 |
|
경복궁의 북문으로 고종 2년(1865) 중건 되었다.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하는데 6.25동란 때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어 보수 하였으며 <고종실록>에 의하면 현판 서사관(書寫官)은 이현직(李顯稷)이라한다. 단간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2익공 양식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건춘문.영추문.신무문은 그 홍예의 높이와 폭, 문루의 평면과 주칸 등이 모두 같은 규모로 되어 있어 정문인 중층의 광화문을 제외하고는 이들 세 문은 모두 규모나 가구.구조수법(架構.構造) 등을 같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