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 한국/부모님과 고향

엄마는 요양 중이다

인해촌장 엄재석 2012. 9. 14. 00:00

 

[ESSAY] 엄마는 요양 중이다

  • 김옥분 수필가
  • 입력 : 2012.09.06 22:38

    海風에 찌든 주름투성이 울 엄마 3남2녀 도시 내보내 공부시키곤
    새벽부터 밭농사에 덕장 일까지, 빈틈없던 당신… 기억력 희미해져
    자식 몰라보는 말갛고 뽀얀 얼굴 이제야 엄마가 美人인 줄 알게 돼

    김옥분 수필가
    바다를 마주한 길가 집의 파란 대문은 닫혀 있다. 함석지붕에는 햇살이 내려앉았는데 대문가의 국기 게양대는 바람만 맴돈다. 한껏 어우러진 붉은색 장미들이 담장보다 더 높이 올라 바깥 동정을 살피는 듯하다. 셋째 아이를 업고 흙을 나르며 그 집을 지었다는 주인은 부재 중이다.

    사실 엄마는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농사일이나 바다를 끼고 벌이를 할 수 있는 일터에 더 많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 거들라치면 "어릴 때부터 험한 일 해 버릇하면 험하게 풀린다"며 내가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모의 뜻에 따라 3남2녀는 일찍 도시로 나가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엄마는 제대로 허리 한 번 펴지 못했으리라.

    엄마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들을 더 선호했다. 오빠들이나 남동생이 용돈을 달라고 하면 더 많이 주곤 하면서 나의 요구에는 야박한 쌀장수가 되질하듯이 깎았다. 그중에서도 둘째 오빠는 늘 엄마의 가슴앓이였다. 오빠가 갓난아기였을 때 엉덩이에 종기가 생겼다.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때라 할머니 손을 거치게 되었는데 너무 힘을 주어 짜는 바람에 덧나버렸고 신경이 손상되어 그만 다리를 절게 되었다. 좀처럼 남을 탓하지 않던 엄마도 계모 할머니는 원망했다.

    젊은 시절의 엄마는 길 가던 사람이 한 번쯤 뒤돌아 볼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해풍(海風)에 찌든 주름투성이였다. 더구나 40대부터 시작된 다리 관절염 통증은 밤잠을 설칠 만큼 심해서 엄마를 더 늙어 보이게 했다. 온갖 처방 약에도 나아질 기미가 없자 엄마는 "내가 너무 몸을 부려 먹고 천대해서 그럴 거야"라며 스스로 고통을 감수했다. 엄마를 견디게 했던 또 다른 힘은 신앙심이었다. 일상의 고단한 한숨 대신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일과의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부처님께 안녕을 기원했다.

    이제는 여유를 가질 만하다고 여겨질 무렵 덜컥 아버지가 쓰러졌다. 엄마의 정성된 구완에도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홀로 된 엄마는 여전히 이른 새벽부터 기도를 시작으로 밭에 나가 농사짓고 일손이 부족한 동네 덕장에 나갔다. 이제는 그저 좀 편안하게 쉬라는 요청에도 "하루해가 지루해서"라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매사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던 엄마에게도 깜박거리는 증상이 있었다. 늙어가는 상징이라고 위로했지만 엄마는 치매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엄마의 증상은 과도한 스트레스성 건망증이라는 진단이었다. 엄마를 두고 사사건건 깐죽거리며 입방아를 찧어대던 친척과의 관계가 원인 같다고 했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여전히 일하려고 움직이는 엄마를 쉬게 하기 위해 둘째 오빠가 모시고 갔을 때였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엄마가 사라졌다. 길거리의 과일 장수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터미널 방향을 물으면서 택시를 타더라고 했다.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도 정작 엄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먼 길을 되돌아 집에 가 있었다. 관절염이 악화되어 잘 걸을 수도 없을뿐더러 경우 바르기로 소문난 엄마의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엄마는 빠르게 변해갔다. 집안에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유난히 깔끔스럽던 엄마가 마루 위에 신발들을 올려놓는가 하면 주워온 페트병이나 돌멩이들을 늘어놓았다. 누가 지나가다가 해코지라도 하면 내쫓기 위한 도구라고 했다.

    열 자식 소용없다는 말처럼 급기야 엄마는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입원 다음 날부터 새벽마다 집에 간다고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매번 침대에 묶였다고 한다. 갑자기 바뀐 낯선 환경이 엄마를 더 많이 두렵게 하고 슬프게 한 것 같다. 입버릇처럼 "자식들에게 얹혀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잠시 다니러 왔을 때도 "세상에 내 집만큼 편한 데는 없다"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던 엄마가 "니거 집에 내 좀 데리고 가주면 안 되나" 하고 애원했다. 나는 엄마의 뜻을 들어주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딸이 되었다.

    엄마는 점점 기력과 기억과 말을 잃어가면서 집을 향한 몸부림도 사라졌다. 어쩌면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기억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는 아주 말갛고 뽀얀 얼굴의 천사가 되어 자식들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엄마가 원래 미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어 안타깝다.

    "엄마, 내가 누구야?" 엄마라는 호칭을 앞세우는데도 "몰래, 내 조캐(조카) 아이가?" 한다. 외할머니의 마흔둥이로 태어난 엄마는 외삼촌과 나이 차이가 많아서 외동처럼 자랐다. 엄마의 인생에서 외삼촌의 결혼으로 얻은 조카는 가장 교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을까?

    "엄마, 집에 가고 싶지 않아?"라고 물으면 "집? 몰래"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표정처럼 멀뚱하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정말 미안해' 하는 내 표정을 아는 것일까. 노안(老眼) 때문이라고 하지만 평소에도 눈물이 많았던 엄마는 줄기차게 눈물을 흘린다. 바다를 마주한 길가 집주인은 그렇게 지금 요양 중이다. 그 집은 여전히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