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자작 수필

각한(角汗)재에서 살락(Salak)산까지

인해촌장 엄재석 2019. 4. 11. 10:59

각한(角汗)재에서 살락(Salak)산까지


 엄재석/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내 고향은 강원도 두메산골 영월군의 작은 면소재지 연당리이다. 그곳에는 기어가는 뱀 모양의 사행하천인 남한강 물줄기가 구비 치며 흐른다. 강과 강 사이에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어 가는 오솔길이 바로 각한재이다. 이 고개 넘으면 초기 조선의 비극적인 왕위 찬탈 역사의 현장인 청량포가 나온다. 16세의 단종이 왕위를 숙부 세조에게 빼앗기고 귀양을 가서 유폐되었다가 사사된 유배지이다. 앞에는 깊은 강물이, 뒤에는 천애의 절벽 사이에 갇힌 어린 왕의 애끓는 한을 지금도 느껴진다. 이 청령포 상류에는 뾰족한 선돌이 강변에 우뚝 서서 각한재를 바라 보고 있다.

 

  각한재라는 지명에는 남 다른 유래가 있었다. 옛날에는 집에서 키우는 소가 주요 운송수단으로 소의 등에 쌀 가마니 같은 무거운 짐을 싣고 다녔다. 험한 고갯길인 각한재를 넘을 때 소의 뿔에 땀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뿔 각()자에 땀 한()자가 들어간 각한재가 되었다. 몸에 땀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뿔에도 땀이 난다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헌데 이 각한재가 남들과 달리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다.

 


각한재 아래에서 태어난 나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같이 각한재를 오르내리며 자랐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수직 절벽 위에서 호연지기도 키웠다. 어느 순간부터 각한재의 의미를 나의 좌우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 뿔에 땀이 나도록 힘든 각한재를 넘어 가는 소의 인내심으로 인생을 살아 보자하면서. 어떤 난관 속에서도 목표한 바를 추구하며 살기로 다짐한다. 지금 생각하면 기특하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하였는지…..

 

 치기 넘치는 젊음 시절부터 나의 호라며 각한재를 쓰곤 하였다. 포털 사이트에 개인 블로그를 만들 때 각한재로 이름도 지어 주었다. 주위에서 나를 각한재로 불러 줄 때 정말 각핸재를 땀 흘리고 넘어가는 황소라도 된 느낌이었다. 이렇듯 각한재는 내 삶이 되어 오랜 성상을 함께 하며 고난 속에서 인내하고 극복하고 도전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20대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시작한 인생 여정이 인도네시아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는 새벽에 일어 나면 살락산을 바라본다. 살락산은 자카르타 남부 위성도시 보고르에 있는 해발 3000 미터의 휴화산이다, 이 산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 정면에서 바로 보인다. 언제 보아도 정감이 가며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데 오늘따라 봉우리를 보는 순간 각한재가 연상된다. 그래 여기서 안주하면 안되지. 마지막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더 치열하게 살자. 각한재의 황소처럼 뿔에 땀나도록 걸어서 마지막 정상을 넘어야 한다.


어슴프레 밝아 오는 여명의 살락산을 바라 보면서 이번 주에 중점으로 추진해야 할 일들을 구상한다. 우선은 지난 주에 입찰한 공장 건설 프로젝트의 후속 조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중부 자와에 건설되는 봉제공장 건설 사업의 발주처에서 추가 자료를 제출하고 미팅에도 참여하여야 한다. 공사 규모도 적지 않아 수주에 성공하면 목표의 절반을 달성하게 된다. 지난 2년간의 준비가 헛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확인하여야 한다. 수주를 위해 애쓴 임직원들의 밤샘 작업이 결실을 맺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다음에는 보고르 시에서 준비하는 생활쓰레기 자원화 사업에 설계를 준비하는 건이다. 이제 토목공사 업체와 합동측량도 마쳤으니 플랜트 구조물의 위치와 부지 표고를 확정하여야 한다. 그럼 전체적인 토공 물량이 나오는데 가능한 절토와 성토의 균형되게 하여 물량을 최소화시키고 싶다. 화요일에는 관계 기술자들과 현장 답사를 통하여 제반 사항을 결정지으리라.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쓰레기 매립장마다 포화상태로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이곳 환경의 현실이다. 생활 폐기물을 분리하여 자원화하는 시범사업이 성공하여 인도네시아 전역에 속히 보급되길 기대하면서.

 

내잃을 준비하느라 오늘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준공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찌까랑의 물류창고 건설현장도 방문해야 한다. 착공부터 지금까지 별탈 없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왔지만 준공까지 챙겨야 한다. 인니에서 처음으로 수주한 공사이기에 잘 만들어 향후 영업에 이정표를 만들고 싶다. 작년 말에 수주한 아파트 건설 습식공사 현장에는 휴일인 어제 다녀왔다. 공정이 한창 진행되는 건축현장의 첫 기성작업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휴일도 없이 수고하는 현장 직원들의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하여야 했다.

 

출근길에 또 다시 바라보는 살락산, 언제인가 때가 되면 거기에 은퇴자 촌이라도 만들고 싶다. 8부 능선을 넘는 중이니 뿔에 땀도 나고 등에 올린 짐이 무겁고 산길이 험해도 열정을 가지고 치열하게 가야 한다. 각한재에서 시작한 우보(牛步 소의 발걸음)로 이제 살락산 정상을 향한다. 오늘 저녁에 펼쳐질 살락산을 휘감는 황홀한 노을의 향연을 기대하며 위자야 사무실로 들어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