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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 막걸리와 코코넛 워터----자카르타 경제신문

인해촌장 엄재석 2019. 4. 2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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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52 >
 
연당 막걸리와 코코넛 워터
 
엄재석/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연당 양조장 집이라 불렀다. 도가집으로 막걸리를 제조하는 공장이자 판매까지 하였다. 당시만 해도 면 단위 마다 하나씩 있다 보니 그 동네에서는 가장 큰 집이 양조장이다. 양조장에는 술밥을 쪄서 식히는 보일러실과 누룩 발효균을 배양하는 종국실이 있다. 쌀밥과 누룩을 비벼 옹기 독에 담아서 일주일 정도 숙성하는 숙성실이 있다. 이 숙성실은 항상 온도가 일정해야 하기에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야 한다. 이어 숙성된 재료를 체로 거르는 제조실로 구성된다. 지금은 막걸리를 알루미늄 용기로 만들지만 옛날에는 어른 키만한 대형 옹기(독)가 사용되었다. 배달하는 술통도 목제였다가 나중에는 20리터 플라스틱 통이 나왔다. 지금은 일회용 작은 용기에 담아서 팔지만 그 때는 큰 통에서 주전자로 따라 마셨다.
 
 
막걸리는 우리의 전통술로 서민들이 즐겨 마셨다. 쌀이나 밀가루가 주 원료로 누룩을 첨가하여 발효시킨 후 걸러 만든다. 방금 막 걸러냈다 하여 ‘막걸리’라는 이름에, 색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다 하여 탁주(濁酒) 또는 탁배기라고 불린다. 농부들이 일하다가 허기를 채울 때 마신다 하여 농주(農酒)로도 불린 알코올 도수 6~7도의 순한 술이다. 값도 저렴하여 서민들이 주로 마시는 술이지만 더운 여름에는 쉽게 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소주와 막걸리가 양대 산맥을 이룬다. 친한 친구들과 등산 후에 파전이나 골뱅이 무침 안주와 함께 마시는 막걸리 한잔은 금상첨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춘궁기에는 먹을 거리가 없는, 보리를 수확하기 전인 3, 4월을 지칭하는 때이다. 이 때에 우리 집으로 술 찌꺼기를 얻으러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먹을 거리가 없어서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를 얻어가는 그 눈망울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조금 커서는 자전거 뒤에 막걸리를 싣고 소매 집에 배달을 하기도 하였다. 더 자라서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키보다 더 큰 독에서 퍼내어 마셔 보기도 하였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며 마시다 취해서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도 하였다. 그래도 양조장 집에서 태어나 밥 굶지 않고 유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강원도 시골 출신으로 드물게 서울 유학에다 대학까지 다니게 되었으니 막걸리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연당 양조장 최고 호경기에는 하루에 200통의 막걸리가 팔려 나갔다.
 
우리 가문의 주업이던 양조장도 어느새 쇄락하기 시작한다.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촌락의 경기는 어쩔 수 없이 하강한다. 거기에다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증대하면서 막걸리를 찾던 주객들의 기호도 바뀌었다, 서민들은 소주로 찾고 상류층은 맥주에 양주를 마시기 시작하며 막걸리는 자취를 감추었다. 점차 판매량이 줄어 들더니 2000년 초에 결국 우리 양조장도 문닫게 되었다. 아쉽지만 영고성쇠 (榮枯盛衰)의 대세를 어찌 거역하라. 그러다가 웰빙 바람이 불더니 막걸리가 건강식품으로 부활하였다. 골프장 그늘 집이나 등산을 다니는 중, 장년층에게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헌데 이는 포천 이동 막걸리나 서울 장수막걸리 등 유명한 몇몇 양조장에게만 해당되었다. 지역 면 단위의 소규모인 우리 양조장은 끝내 열리지 못하였다.
 
일 따라 전전하다가 인도네시아까지 오게 되었다. 업무상 교제나 지인들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식당을 찾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국민이 이슬람인 인니에는 보통 식당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 단 허가받은 식당에만 한국에서 수입한 소주나 인도네시아산 빈땅(Bintang) 맥주를 판다. 어떤 식당에서 우리 전통 막걸리를 제조하여 팔기도 하여 막걸리를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옛날 연당 막걸리 맛에 대한 향수 탓인지 나의 관심은 남달랐다. 하지만 너무 텁텁하고 사이다 같이 신맛이라 시음으로만 그쳐야 했다. 시원하고 담백하며 적절한 향기의 막걸리 맛이 아니었다. 하기야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그 막걸리 맛을 찾다니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따로 없지……
 
그러던 어느 날 그 막걸리의 대안을 찾았는데 바로 코코넛 워터(Coconut water)였다. 이 나라 말로 아이르 끌라빠(Air Kelapa)로 야자수 열매 속에 담긴 투명한 액체이다. 어린 아이 머리만한 크기의 야자수 위 부분을 잘라 내면 하얀 속살과 용액이 드러난다. 코코넛이 성장하면서 흰 속살은 단단한 과육이 된다. 완전히 성숙한 코코넛보다는 덜 익은 열매가 더 맛있다. 맛있는 코코넛 워터를 얻기 위하여 푸른 빛을 띤 덜 익은 코코넛 일 때 수확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코코넛 워터가 대중적인 음료인데, 흔히 길거리 상인들이 초승달 모양의 칼로 그 자리에서 잘라 판다.
보통 한 개에 우리 돈으로 천원 정도라 현지인들도 부담 없이 마신다. 코코넛 워터를 마신 후 긁어 먹는 어린아이 볼 같은 하얀 속살은 또 다른 별미이다.
 
 
 
인니 골프장 그늘 집에서 코코넛 워터를 처음으로 마셔 보았다. 처음에는 무미한 맛에 조금 찝찔한 느낌이어서 이런 것도 마시나 했는데 자주 마시다 보니 인식이 바뀌었다. 우선은 무공해 천연음료로서 여러 가지 효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위장 장애에 좋고 다이어트 음식으로 혈압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거기에다 젊은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도움을 주고 노화를 예방한다는 학설까지 있다. 이를 일일이 검증할 수 없지만 일단은 첨가제가 없는 천연 음료라 안심하고 마신다. 이웃 필리핀에서는 임산부들이 풍부한 모유를 만들기 위하여 코코넛 워터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막걸리와는 효능뿐 아니라 약간은 엷지만 색상도 비슷하기에 막걸리라 생각하고 마신다.
단지 마시고 취하지 않는 점이 다르지만……성경에도 취하지 않게 마시라 했으니 어찌하랴.
취하지 않는 막걸리, 코코넛 워터의 위대한 발견이다. 앞으로 막걸리가 그리울 때면 이곳 인도네시아의 코코넛 워터를 마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