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1막 한국/소망의 길

6남선교회의 영주 야외예배에서----소수서원

인해촌장 엄재석 2012. 6. 6. 00:00

교회의 6남선교회가 야외예배를

경상북도 영주로 간다.

유학의 마을 영주의 소수서원으로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가는 길이 흥겹다-----찬양의 기타를 치시는 집사님이 있어서

여주 휴게소에서 지난 달에 수술을 마친 최승호 집사네와

사진을 찍는 임오혁 집사님의 폼

 

임오혁 집사님이 찍어 주신 우리네  부부

오늘의 행사를 주관하는 지휘부

제일병원에 계시는 내과 의사님

중식에 앞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안창준 회장님

맛있는 영주 한우 불고기가 익기 시작하니 군침이

식사를 마치고 재래의 농기구 전람실에서

건설선교회의 임재관 회장님이 뭔가를 심각히

시골 출신의 김동래 집사가 열심히 설명하고

정호철 전임 회장님은 항상 미소가 떠나질 않네

1층에서는 한우를 사는데 정신이 없으시네

자 이제는 소수서원을 향하여

우리 전도부가 모두 합동 사진을

전도부 합동 사진

 

경자 바위의 유래가 위에

소수서원의 맑은 냇가가 인상적이네

옛날 서당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은 어디 가고

대청마루 여름에는 얼마나 시원한지

소수서원을 두루 살피는 교인들

학구제-----

작은 대문앞에선 우리네 부부

시원한 샘물을 맛보니

정원을 둘러 보고

도랑을 건너는 다리 위에

내려다 본 하천의 맑은 물

풍광정이라는 정자---시가 절로 나올 듯

유학의 대가를 모신 곳---공자 안향 주세붕 이색

목판을 둘러 보는 관람객들

인의 술을 펴다...누구의 이야기인가?

소수서원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조형물

해동공자라 일컷던 안향의 초상화

영주에서 서울로 가는 모습들이 벽화로 만들어져 있다.

 

 

소수서원 [紹修書院]남한 경북 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講學)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