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자작 수필

살룰라의 추억--1

인해촌장 엄재석 2019. 7. 16. 13:30

살룰라의 추억

 

엄재석 /인도네시아 PT.ACE

  

지난 밤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의외의 메일이 날라 왔다. 발신인은 전에 일하던 건설현장의 원청 시공회사 공사부장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추천한다는 내용이다. 내용인즉  PT. ACE E&C는 살룰라 지열발전소 건설 공사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현재 이 회사의 주축 멤버인 엄재석 이사가 당시 부지조성공사 하도급 업체의 2번째 소장으로 부임하여 엉망으로 망가진 현장을 수습하였습니다.”라며 이를 참고하라고 친절히 내게 보냈다. "아니 나를 잊지 않고 이런 추천서까지 써 주다니 이럴 수 있나?" 메일을 보니 그 시절 살룰라의 추억들이 되살아 난다

 

살룰라는 수마트라 북단에 있는 제주도 크기의 청정 호수 토바호 인근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다.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2시간 이동하고 다시 차량으로 5시간이나 걸린다. 물론 섬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는 이 정도는 멀지 않다고 하지만 자카르타 인근에서만 일하던 나에게는 오지였다. 행정구역으로 다루뚱 군 살룰라 면으로 기독교도가 대부분인 주민들로 전형적인 인도네시아 산간 농촌마을이다. 평화로운 이 마을에 갑자기 대형 공사판이 벌어졌는데 지하 온천에서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를 이용한 지열발전소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에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회사 H건설이 턴키 베이스로 수주하여 공사가 시작하였다. 공사기간 4년간의 대 장정에 주관 회사로 H건설뿐만 아니라 협력회사들의 많은 건설기술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 모두의 땀과 노고 속에 살룰라 지열발전소는 2017년에 준공하고 330Mw의 전력을 생산하는 상용 발전을 시작했다. 이는 20만 가구가 사용 가능한 전기 용량으로 열악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전력시장에 단비가 되었다.

 

 

지열 발전은 지하 3Km 이상에 있는 뜨거운 온수에서 나오는 고온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일으킨다. 화력, 수력, 원자력 등 다른 발전방식에 비해 화석 에너지 소모가 적은 친환경 발전방식이다. 깨끗하고 경제적인 발전 방식이지만 아무 곳에서나 건설할 수 없다. 유한한 매장 한계를 가지고 대기 오염을 유발하는 석유나 석탄에 비해 지열은 유용하게 쓰일 소중한 에너지 자원이다. 지금 세계는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 대신에 신 재생에너지로 지열, 풍력, 태양광 발전을 주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열 발전은 풍력과 태양광처럼 날씨와 기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청정 에너지원이다. 환태평양 지진대로 불의 고리에 위치한 인도네시아에는 화산이나 온천이 많아 지열 발전의 개발이 유망하다. 전문가들은 향후 지구의 총 지열 발전 용량의 40%는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될 것으로 예상한다. .

 

후일 이 공사에 참여한 H건설의 기술자가 건설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2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외국에서 수입한 대형 기자재를 항구에서 현장까지 운반하는 일이다. 곡선형 밀림산악도로에다 노후화된 2차선 지방도로의 상태가 대형 장비의 이동을 어렵게 하였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예상 루트를 사전에 답사하고 최적의 코스를 선정하고 운반 중에도 비상사태에 대비한 시물레이션을 반복해야 했다. 헌데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이 바로 비였다. 인도네시아는 통상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가 우기철이고 그 외 건기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착공하던 그 해에는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상기후로 부지조성 공정 진행을 방해하였다. 토공 작업이 매일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정체상태에 들어서자 관계자들은 공기 내 완공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이상 강우가 나에게 살룰라의 추억을 만들어 줄지를……

  

해결사로 채용되어 살룰라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했다. 비는 매일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현장 관계자들 모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대책없이 새로 부임한 소장의 역량에 기대하는 눈치들이다. 나의 기술력과 다년간의 경험에 근거한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길 기다린다. 하지만 나라고 용 빼는 재주 있나? 그저 비에 젓은 현장에 나가서 지반토질 상태를 파악하며 백호, 불도저, 덤프 등 중장비 운전사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내 머리 속은 토공공사 대안을 찾느라 복잡하기만 했다. 어찌해야 하나? 겁 없이 덤벼든 내가 잘못이지 상황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그저 나에게 솔로몬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여러 어려움 중에서 최우선 과제는 사토장 확보였다. 산비탈을 깎아서 발전소 부지를 만들기에 많은 잉여 토사를 처리할 장소로서 계곡을 메워서 사토장을 만드는데 계곡수 처리가 쉽지 않았다. 원래 설계는 Aramco Pipe라는 조립식 관거 부설인데 이를 시공해 보니 상재 토압으로 인한 파단현상이 나타났다. 거듭된 실패 끝에 구조물 기초용으로 항타할 강관 파일을 사용하는 대안으로 이를 해결하였다. 콜롬부스의 달걀이라고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데.....

 

어렵게 사토장이 확보되자 주야로 내리던 우천의 강우 강도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때가 왔다 판단되자 50 여대의 백호를 모두 동원하여 한일()자로 세우고 한 바가지씩 토사를 운반하였다. 원래는 백호로 덤프트럭에 상차를 하고 덤프가 운반하고 나중에는 도자로 미는 것이 토공의 원칙이다. 하지만 젓은 지반 상태가 덤프트럭의 주행은 고사하고 백호조차 홀로 이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에서 사용한 학익진 형상으로 모든 백호를 전개하고 그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였다. 수하의 직원이나 십장들에게 맡길 상황이 아니어서 장비 운전 원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다. 발주처가 지정한 기한 내 부지조성을 위하여 말이 현장소장이지 토공 십장처럼 새벽부터 야간까지 현장을 돌아 다녀야 했다. 하지만 내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건설이 무너진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건설 인생 30년에서 가장 힘들었던 현장이 바로 살룰라 시절이다. 그렇게 오기로 버티다 보니 날씨와의 싸움을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 엉망(?)이던 현장을 다음 공정 단계로 올려 놓게 되었다. 더 이상의 존재가치를 고민하다가 새로운 일터가 나오자 살룰라를 떠나 왔다. 지난 과거는 아름답다지만 나에게 그 때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공사부장의 메일은 살룰라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래도 나를 지열발전소 성공에 기여한 기술자로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살룰라의 추억을 자랑하리라. 성공이든 실패의 경험일지라도 소중한 자산이 되어야 한다. 세계 최대의 지열발전소 건설의 성공의 과실은 H건설뿐만 아니라 참여한 협력회사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제는 살룰라가 강한 긍지와 자부심이 되어 더 힘든 프로젝트에 도전하리라. 나를 인정해준 그 공사부장이 추진하는 새 프로젝트의 성공을 빌며 그 여정에 도움이 되길 기원한다.